The Deep Fissure
Hans Buchner Amnesty International Germany Coordinator for South Korea 한글번역 아래 참조 The Sewol ferry sank in April 2014. 304 passengers – most of them adolescents – died. Nine of the victims remain missing. The disaster has profoundly changed South Korean society. A deep fissure has suddenly appeared in the shiny surface of the economic power; negligence and corruption, reaching far beyond this particular incident, have become apparent. The general public became aware of the failures of the system, and it lead to many protests. It is outrageous that those responsible individuals from authorities and the government have not been held accountable. Furthermore, broadcasters and newspapers – “well-behaved lap dogs of the president” – initially gave false reports on the number of victims and, later, about families. The yellow ribbons stand for the wish of the victims' families to clarify the course of events during the sinking of the Sewol ferry by independent investigation. The president has refused to meet with the beleaguered family members, even during the life-threatening hunger strike. On the one-year anniversary of the tragedy, she finally promised to recover the sunken ferry. However, in July, 2015, the government arrested seven organizers of the protests. And this is the heart of the problem: the “ice princess” has been handling the disaster dreadfully. On the day of the tragedy, she was not available for seven hours, and, she showed hardly any sympathy later on. President, Park Geun-hye’s increasingly authoritarian leadership style that suppresses any opposing opinions and her previous mistakes during her presidency (such as manipulation of the presidential election by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and the mis–selection of prime ministers) have profoundly shaken the trust of the Korean people. Her reputation has fallen significantly. South Korea’s democracy has been damaged. 깊은 균열 한스 부흐너 국제 앰네스티 독일의 한국 담당 2014년 4월 세월호는 침몰하였다. 목숨을 잃은 304명의 승객중 대다수는 청소년들이었으며, 그 중 아직도 9명은 행방불명인 상태다. 이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이 참사는 단순한 사건을 넘어서, 그 간 한국 사회의 화려한 경제력 이면에 가려졌던 태만과 부정부패가 명백히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오류를 자각한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집회를 시작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정부와 관련 당국의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소위 "대통령의 충견" 국내 방송사와 신문사들은 희생자 수및 유족들에 관한 오보를 쏟아냈다. 노란 리본은 세월호 침몰 과정의 진상을 독립적인 기구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유가족들의 소망을 상징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가족들과의 면담을 계속 거부해왔다. 심지어, 목숨을 건 단식 농성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되자 그제서야 선체 인양을 약속했을 뿐이었고, 2015년 7월에는 오히려 관련 집회를 기획했던 7명의 인사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얼음공주" 박근혜 대통령의 참사 대응은 끔찍했다. 사고 당일 그녀는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고, 그 이후에도 따스한 연민 따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이견을 철저히 짓밟는 박대통령의 권위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과 아울러, 임기 중의 다른 실책들 (국정원을 동원한 대선 조작및 부적당한 국무 총리 임명)로 인해 그녀는 국민들의 신뢰를 크게 잃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평판은 급격히 추락했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훼손당했다. |
독일 Badische Zeitung 신문 기사 번역
한국인들은 더 이상 지도층을 신뢰하지 않는다
(Die Menschen vertrauen den Eliten nicht mehr) Felix Lill 2016, April, 9 한국은 2년 전 304명의 사망자를 낸 선박침몰사고라는 대참사를 경험한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의 사회지도층을 향한 신뢰는 파괴되었다. 사진: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304명이 생명을 잃었다. 서울에 위치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벽 이금희씨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상황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장기화된다면 나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곧 죽을 것 같아요." 짧은 머리의 여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 동안의 긴 싸움은 그의 기력을 점차 앗아갔다. 먼저 고혈압이 왔고, 지금은 당뇨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금희 씨는 몇 주째 병원에 입원 중이다. 팔에 링겔을 꽂고 하얀 환자복을 입은 그는 다시 울먹인다. "제 딸은 저의 제일 친한 친구였어요. 지금 저는 제 딸이 죽었다는 것만 알고, 아직도 아이를 보질 못했어요.“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만도 참담한 일인데, 사랑하는 그 딸은 수학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다른 친구들처럼 겨우16살이었다. 조은화 양은 아직도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9 명의 희생자 중의 한 명이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잘 수습하여 장례를 치뤄야만 고인이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은화 양의 어머니 이금희씨는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세월호는 아직도 물 속에 있어요. 아마 은화는 아직도 선실에 있을 거예요.“ 이금희씨는 은화양이 학교를 다니던 안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 중이다. 병원 테이블에는 은화양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 소녀의 천진난만한 얼굴은 어머니의 핸드폰 배경화면 속에서도 웃고 있다. 이금희 씨는 정부나 대중 앞에 나설 때면 단지 "조은화의 어머니“일 뿐이다. 결국, 이 참사의 진짜 희생자는 은화 양이고, 그의 모든 활동은 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국가적 참사가 발생한지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사건의 경위는 간단하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는 인천을 출발하여 한국 남단에 위치한 휴양지인 제주도로 향했다. 그러나 배는 목적지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침몰하였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서울의 외곽 도시, 안산의 학생들이었다. 이 참사가 “평범한” 사고였다면 한국사람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 여기에 분노와 불신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격앙된 감정들이 여전히 세월호참사를 지배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참사를 겪으며 정부 지도층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으며 또한 이를 계기로 지난 독재시절의 진영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세월호 유족들과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해 참사 1주기를 맞아 열린 집회에서는 만 여명의 시민들이 정부의 신속하지 못한 진상규명을 규탄하였고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맞대응하였다. 반면 거리에서 단식시위을 하는 유족들을 조롱하고 난동을 부리며 유족들을 탐욕스러운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이들이 있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이전에 군부 독재를 지지하던 이들과 그에 반대하던 이들로 나눠지던 양상과 비슷하다. 이금희씨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들을 금기시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치가 국민의 최선을 위한다고 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마치 무언가 금지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젊었을 때의 독재 시절보다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믿고 싶어요. 그런데 내 딸의 유해는 왜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건가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왜?라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왜 구조가 그렇게 늦어져서 476명의 승객 대부분이 생명을 잃었는가? 세월호는 왜 사고 당시 파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몰 직전 급변침을 했는가? 왜 배가 전복할 정도로 화물을 과적했는가? 왜 선원들이 탈출하는 동안 승객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했는가? 왜 침몰 직전 몇 분간의 여러 레이더 항적기록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가? 그리고 왜 참사후 2년이나 지났는데도 이런 질문들을 아직도 하고 있는가? 사실, 이 모든 질문에 답은 있으나,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매번 그 답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은 그저 불운한 사고였다는 인상을 주는 답변을 내놓고, 어떤 사람들은 시나리오 작가도 상상해 내기 힘든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사회는 양분되어 있다”는 말을 2년 전부터 자주 듣고 읽곤 한다. 물론, 이것은 63년에 걸친 남북한의 분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된 레이더 항적자료들 군사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한 지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한국에 어떻게 이런 불신이 생겨날 수 있을까? 이금희 씨의 병상에서 기차로 한시간 반 거리, 서울 (한국의 수도)에서 김어준 씨는 매일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김어준씨는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언론인이자 정치풍자가 중의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아주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화창한 오후 김어준씨는 담배를 물고 자신의 스튜디오 앞에 서 있다. 스튜디오 입구에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나의 제일 친한 친구, 좋은 사람(이명박)을 소개합니다” 장발에 수염을 기르고 덩치가 좋은 김어준씨가 농담을 하며 낄낄거린다. 김어준씨의 스튜디오는 약 50석의 규모로, 낮에는 카페겸 도서관으로 쓰인다. 어쩌면, 이 스튜디오의 존재 자체가 지난 몇 년간의 한국 정치계의 흐름을 설명해준다. 2008년 취임과 함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온건한 대북정책을 중지시킴으로 전임 대통령들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단절시켰다. 이에 반하여 김어준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를 비평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김어준 씨는 여러번 법정에 섰지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최근 김어준씨는 <파파이스>라는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파파이스는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비판한다. 또한, <파파이스>는 세월호 참사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고, 김어준씨는 탐사보도성 (영화 제작을) 위한 모금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는 진실된 보도를 보장합니다.”라고 한 약속은 주류언론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말이었다. 김어준씨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접근방식은 정부나 청해진해운사의 것과는 상이하다. 그는 노트북을 열어 해군, 해경 그리고 세월호 자체의 레이더기록이 표시된 해도를 보여 주었다. 이 기록들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 마지막 몇 백 미터를 보여준다. 그는 "원래는 이 세 가지 자료가 동일한 경로를 보여줘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월호 자체의 레이더 자료를 보면 마치 침몰 직전에 어떤 변침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나, 해군의 자료에는 급작스런 변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며, "또한 레이더에 기록된 경로들은 서로 800 m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런 오차는 측정오류로 보기에는 범위가 너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세월호 자체의 항적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듭니다. 배가 섬에서 멀리 떨어져 침몰하면 사고로 보입니다.” 고 지적하였다. 비약이 심한 듯하지만 해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단서들이 존재한다. 침몰 직후 그 부근을 통과하던 다른 선박의 선장이 자신이 운행하던 배의 레이더 기록을 보여 주었는데, 이에 의하면 세월호는 정부나 청해진해운사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섬에 가까운 지점에서 침몰했다. 그렇다면 세월호참사는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인가? 김어준씨와 그의 팀은 아마 아무도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계획하지는 않았겠지만, 배의 침몰은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 “보험사기는 해운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며, 청해진해운과 그 소유주는 이 세월호 침몰 이전에도 여러가지 불법행위를 적발당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3월 말경,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가 요청한 증인들은 오히려 더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 청문회에서 청해진 해운과 국정원의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들이 나왔다. 또한, 국정원이 세월호를 비밀업무 수행을 위한 자금줄로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직까지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설명된다. 한겨레 신문은 "지금까지 어떤 조사와 재판도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있어, 정말 제대로 된 조사를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라고 평했다. 정부 측에서 보면 김어준씨와 같은 사람은 음모론자이다. 장기욱, 해수부 인양추진과장은 그런 조사들에 언급을 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는 “저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양작업은 쉽지 않다. "중요한 부분의 손상없이 인양을 하기 힘들 정도로 조류가 셉니다. 그래서 저희 잠수부들이 매일 내려가서 사전작업을 하고 영상을 통한 분석을 하는데, 7월까지 세월호 인양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라고 설명한다. 사실, 인양완료 시점을 7월로 잡은 것은 의외이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최종보고서를 6월에 발표할 예정인데, 말하자면 선체에 대한 정밀조사도 없이 진상조사결과가 발표되는 것이다. 장기욱 과장은 "우리는 인양만을 책임진다”며 영상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데이터의 양이 너무 크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정확히 얼마나 큰 지는 모르지만 아주 크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이와 비슷한 상황들을 자주 접한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거주했던 도시, 안산으로 다시 갔다. 올해 18살이 되었을 도언양의 어머니, 이지성 씨는 딸의 학교를 향해 조용히 걷는다. 긴 머리에 마른 몸집의 그는 예전에 도언이가 했던 것처럼 매일 학교에 간다. 10개의 교실은 추모의 장소가 되었고 2년 전부터 이곳 삼층에는 수업이 열리지 않고 있다. 책상과 의자에 놓인 사진, 꽃다발과 과자들이 떠나간 학생들을 대신하고 있을 뿐,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이지성씨는 "학교측은 유족들이 추모교실을 내어줄 것을 요구합니다만, 이 나라는 이 사건을 상기시킬 무언가가 필요해요.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에요. 정부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정부가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라고 조용히 말한다. 이런 의혹과 단서들이 그저 음모론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수백만 명의 한국 사람들이 지도층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시사비평가 김어준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흉상 사진 : 딸 김도언양의 사진을 들고 있는 이지성씨 |